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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호암지, 조선전기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일제시대 산미증식계획에 따라 증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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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군민의 부역에 의해 만들어짐.


기사이미지 https://kpnnews.cdn.ntruss.com/202405230216011716441361020
1920년대의 충주 호암지 전경(호암지를 가로질러 도로를 냈고, 멀리 탄금대(대문산)가 보인다).


충주 호암지에 천연기념물인 수달 서식이 시민들에 의해서 확인이 되면서, 호암지 개발과 보존을 두고 시민들의 의견이 분분하다.


충주시와 일부 주민들은 호암지에서 생태계가 잘 발달된 습지를 매립해 청소년놀이복합시설을 설치하려고 하고 있다.

습지가 없는 일부 지자체는 예산을 들여 습지를 조성해 생태공원을 만들어 학습용과 시민들의 휴식처로 사용하고 있는데, 충주시는 잘 보존된 습지를 매립하려는 계획이 시민들에게 알려지면서 습지보호를 둘러싼 시민단체와의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


일부 시민은 호암지가 일제시대때 축조된 저수지라 역사적인 가치가 부족하고 일제의 잔재로 치부해 무리한 개발과 경관을 해치며, 자연생태계를 훼손하는데 동조하고 있어 시민들이 양론화되고 있어 호암지의 역사를 되집어보고자 한다.


2017년 9월 7일과 9일 전홍식 박사가 호암지 답사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요약한 호암지에 대해 기술하였다.


※ 호암지 답사 준비 (2017년 9월 7, 9일 )


1. 답사 목적

- 우리의 저수지 소제(연지), 대제의 역사를 이해

- 호암지로의 식민지적 변화 이해

- 식민지 수탈구조에 대한 이해


2. 호암지의 역사에 대한 이해

1)조선시대 수리시설

 - 조선시대 수리시설은 제언(堤堰), 보(湺)

 - 조선시대 들어 농업중시 (농본억상), 제언과 보의 정비 확충

 - 조선전기 「세종실록지리지」(1454) 충주목  제언(堤堰)조에  “소제 1, 대제 1이다. 길이가 480척인데 66결에 물을 댄다”

 - 조선후기 「여지도서」(1759), 「충청도읍지」(1780), 「호서읍지」(1870)

   “소제는 현의 남쪽 5리에 있으며, 둘레는 2.068척이고 수심은 3척이다”

   “대제는 현의 남쪽 8리에 있으며 ,둘레는 1,908척이고 수심은 3척이다”

 - 「여지도서」에 의하면 충주에는 61개의 제언(저수지)가 있었으며 전국에서 7번 째로 많은 수치. 「충청도읍지」 「호서읍지」 62곳.

 - 조선후기에도 수리시설로 제언과 보를 이용하였지만, 제언을 논으로 만들어 경작하거나, 저수지 안에서 농사짓는 경우가 증가하고 화전과 개간 등의 발달로 폐지되는 제언이 증가.

 - 18세기 이후 수리시설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보(洑)로 하천을 막아 보를 축조하고 수로를 만들어 물을 끌어들이는 것이 주된 수리시설로 이용 됨. 


2) 일제강점기 수리시설의 식민지적 변화

  (1) 식민지배와 일본인의 이주 그리고 성장  

 - 일제강점기 식민지의 조선은 식민지 모국 일본을 위한 식량과 원료의 공급지, 상품판매지로 전락

 - 식민지의 자원과 원료 수탈하기 하기 위한 거점으로 식민지 도시 건설 지배의 거점으로서 관공서, 은행, 회사, 종교시설, 재판소 등 지배자인 일본인들 위한 지배의 공간 형성

 - 러일전쟁(1904)년을 전후하여 충주에 일본인들의 이주 증가. 이주 일본인들은 충주읍내에서 상업에 종사하였고 일제의 보호와 후원아래 부를 축적하고 지역의 지배자가 되었으며 대토지를 소유한 식민지 지주로 성장.

  

  (2) 일본의 쌀부족 문제와 산미증식계획 

  - 1906년 3월 수리조합 조례 공포

  - 일본 국내의 식량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20년 산미증식계획을 수립하면서 수리조합사업을 활성화.

  - 수리조합설립 목적 :  일본의 식량부족  ⇒ 산미증식 계획 ⇒  토지개량(수리조합사업), 농사개량 ⇒ 쌀 증산


 (3) 충주수리조합과 소제 대제의 식민지적 변용

   - 일제강점 이후 1910년부터 수리시설 개선시작

   - 식산은행으로부터 35,000원의 자금을 빌려 1917년 소제 대제와 용산보, 봉계보 개수공사 시행

   - 1918년 대제 제방축조를 시작하여 1919년 완성하고

   - 1922년 충주수리조합인가 - 구역은 달천, 단월, 봉산, 용산, 호암동 일대의 달천평야 395정 

   - 충주천으로부터 도수로를 통해 물을 끌어 들여 소제를 확대하는 것으로 시설변경을 하고 1924년 3월 공사룰 완공하고 호암제(虎岩堤)로 

     명칭 변경

   - 1926년 홍수로 보의 일부가 붕괴되어 복구공사와 구역확장계획에 대한 인가를 얻어 1927년에 공사 완성.


    (4) 공사진행

    - 총독부와 일본인들에 의해 설계되었지만 모든 공사는 충주군민의 부역에 의해 만들어짐

    - 각 면에서 사람들이 동원되어 삽, 괭이, 단가 등 등짐으로 저수지 수축, 수리조합의 장시간 가혹한 노동은 원성의 대상

    - 수많은 충주사람들이 고통을 겪고 희생된 피와 눈물이 어린 저수지.

      

   (5) 개수사업 결과


  - 전통적인 제언과 보가 수리계를 통해 경작자를 중심으로 운영되는 데 비해 수리조합은 조합원의 자격을 토지소유자로 하여 소작농을 배제

  - 수리조합은 총독부-도-군-수리조합으로 연결되는 반관반민의 단체 식민권력의 강한 통제를 받고 자율성이 없는 조직이 됨

  - 수리조합사업은 식민권력과 대지주(조선인, 일본인 지주) 중심의 농업개발

  - 수리조합비의 부담을 놓고 지주와 소작농간의 갈등 발생, 소작쟁의 발생, 조합비 증액에 농민들이 토지를 매도하고 소작농으로 전락

  - 자작농, 소작농의 급속한 몰락 초래, 급격한 사회변동 발생

  - 수리조합사업으로 달천평야에 토지를 소유한 일본인 지주와 소수 조선인 지주의 쌀생산 증가 토지매입 촉진 초래

  - 충주에서 생산된 쌀은 1928년 충북선이 개통하면서 충주-조치원- 군산을  거쳐 일본으로 이출됨


3. 답사 순서와 설명

 1) 답사 순서

 충주천 도수관 입구 - 검지고개 - 더베이스 호텔 - 호암지 입구 - 일본인 위령탑 - 조명규 공덕비 - 스즈끼 세이코 공덕비 - 제방 


  2) 설 명

 ■ 도수관 : 충주천의 역사, 범바위 유래, 충주읍내의 지형, 도수관 설치 이유와 용도

 ■ 검지고개 : 영남대로와 읍내도로

 ■ 호암지 입구 : 호암지의 역사


    소제(연지), 대제 - 세종실록지리지, 여지도서, 충주군읍지


    호암지 축조배경 :

         ㆍ식민모국 일본과 식민지 조선의 관계

         ㆍ식량과 원료의 공급지, 상품소비시장

         ㆍ일본인 이주와 성장

         ㆍ일본의 식량부족문제 -산미 증식계획 -충주수리조합- 호암지축조

         ㆍ주도세력 조선총독부, 이주일본인과 소수 조선인지주


    호암지 축조과정 : 

        ㆍ강제 부역을 통해 삽과 괭이로 건설

        ㆍ읍내와 인근 면민들 동원하여 축조

        ㆍ수많은 충주 사람들이 고통을 겪은 피와 눈물이 어린 저수지

        ㆍ1910년대 도로건설로 인한 강제부역

        . 1920년대 저수지 건설로 인한 강제부역

         

■ 일본인 위령탑 : 

       ㆍ저수지 수축이후 수년이래 많은 사람들이 연못에서 희생되어(50 여명) 마(魔)의 연못으로 불림.

       ㆍ원한이 깊기에 이들을 위로하기 위해 익사자들의 위령탑을 1938년 건설

      ㆍ 위령탑에서 위령제 지냄

■ 조명규 공덕비 : 일제시대 충주읍 부면장, 해방후 수리조합장           

■ 스즈끼 세이꼬 공덕비 : 스즈끼는 식민초기 이주한 일본인 전형적인 사례, 아래로부터 풀뿌리 침략자, 공덕비와 허상과 실상        ■ 제방 : 충주평야 이야기

           호암제 글씨 확인, 

           주변 둘러보기

■ 기타


  4. 정리 평가

    - 호암지의 역사를 기억하고 전승하여

    - 호암지가 우리 충주사람들의 저수지가 되도록 관심과 사랑이 필요.


시민 A 씨는 조선시대에도 호암지의 중요성과 역할이 컷으며, 일제는 산미증식계획에 의해 쌀을 생산해 일본으로 갖고가기 위해 모시래뜰과 달천뜰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증축을 했으며, 충주군민들의 강제노역과 해방후 증개축을 통해 현재의 호암지가 됐다.


역사적 의미와 생태계가 잘 보존되어 있는 이 곳 호암지에 천연기념물 수달이 서식하고 멸종위기 높은위기 등급인 대륙송사리도 서식하고 있으며, 꾸구리, 자라, 잉어, 붕어, 메기, 피라미, 가물치, 미꾸라지, 뱀장어, 민물새우, 너구리, 어라연꽃, 부들, 참새, 수련꽃, 연꽃, 억새, 멧비둘기, 등등 생태계가 조화를 이루고 있는 호암지의 자산가치는 숫자로 표현하기 힘들다고 하면서,호안지를 보존해 열섬현상에 의한 도심온도 저하, 미세먼지 저감효과를 비롯해 다양한 수생태계 보존을 통해 미래세대에게 좋은 환경을 물려주도록 해야겠다 고 말했다.


yig745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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